정은지 파도, 6년 만의 미니앨범에서 처음으로 끝까지 자기 손을 탄 타이틀곡
[MV] 정은지(JEONG EUN JI) - 파도 (i love LOVE) / Summer, I · 정은지 EUNJI (공식 채널)
8월 11일 저녁 여섯 시에 정은지의 미니 5집 Summer, I가 나왔습니다. 미니앨범만 놓고 세면 6년 1개월 만이에요. 타이틀곡 제목은 파도, 괄호 안에 i love LOVE가 붙습니다. 여름 끝자락에 나온 앨범치고는 서두르는 기색이 없는 곡입니다. 오늘은 이 곡이 어디서 출발했고 일곱 곡이 어떻게 놓였는지를 따라가 볼게요.
여름이 다 가기 전에 도착한 앨범입니다
8월도 중순으로 넘어가는 참입니다. 여름 노래를 내기에는 늦은 시기예요. 대개 6월 말이나 7월 초에 몰리고, 8월 둘째 주쯤이면 가을 앨범 이야기가 슬슬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 자리에 여름을 제목에 박은 앨범이 하나 들어왔습니다.
정은지의 다섯 번째 미니앨범입니다. 직전 미니앨범은 2020년 7월에 나온 심플이었으니 6년 1개월이 비었어요. 솔로 앨범 전체로 넓혀 봐도 2022년 11월 리메이크 앨범 log 이후 3년 9개월 만입니다. 그사이 무대와 연기 쪽 활동은 이어졌지만 자기 이름으로 묶은 신곡 앨범은 오래 비어 있었습니다.
앨범 이름을 소리 내어 읽어 보면 구조가 보입니다. Summer, I. 여름 뒤에 쉼표를 찍고 나를 놓았어요. 여름에 관한 앨범이 아니라 여름에 서 있는 사람에 관한 앨범이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앨범 이미지도 그쪽입니다. 빈티지한 파일 인덱스와 폴라로이드 사진을 가져와 지나간 계절을 정리해 둔 서랍처럼 꾸몄어요.
본인은 이번 앨범을 두고 성장했나라는 물음표와 느낌표가 같이 있는 작업이라고 말했습니다. 확신에 찬 복귀작이라고 내세우지 않은 셈이에요. 이 온도가 타이틀곡에도 그대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곡 하나 나온 날로 넘기기에는 아까운 앨범입니다. 6년 만의 미니앨범, 전곡 프로듀싱, 처음으로 끝까지 자기가 붙잡은 타이틀곡이 한 장에 겹쳐 있거든요.
여름에 관한 앨범이 아니라 여름에 서 있는 사람에 관한 앨범입니다. 쉼표가 그 자리를 만들어요.
타이틀곡은 질문 하나에서 출발했습니다
파도 (i love LOVE)는 제목이 두 겹입니다. 앞은 한국어로 파도, 뒤는 사랑을 사랑한다는 문장이에요. 둘을 겹쳐 놓으면 밀려왔다 빠지기를 반복하는 것과 그 반복 자체를 아끼는 마음이 나란히 섭니다.
곡의 출발점은 나는 어떤 사랑을 하는 사람일까라는 질문입니다. 상대를 향해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자기를 향해 돌린 질문이에요. 지나온 사랑의 순간들을 한 번씩 되짚고, 그 끝에서 결국 나를 더 아끼는 쪽으로 방향을 잡습니다. 사랑 노래인데 대상이 상대에서 자기로 옮겨 가는 구조입니다.
가사와 곡을 정은지가 직접 썼습니다. 그동안에도 앨범마다 자작곡을 실어 왔지만, 타이틀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가 맡은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어요. 물음표와 느낌표가 공존한다는 말이 여기서 다시 걸립니다. 잘 만들었다고 못 박는 대신 만들어 봤다는 쪽에 가까운 태도예요.
소리는 밴드 사운드 쪽입니다. 후반으로 갈수록 음이 높이 올라가는 곡이고, 기타는 적재가 잡았습니다. 목소리와 기타가 부딪히지 않게 서로 자리를 비켜 주는 편성이라, 편곡을 잔뜩 쌓아 올려 감정을 밀어붙이는 방식과는 결이 다릅니다.
뮤직비디오는 3분 25초입니다. 공식 채널에 올라온 영상이니 음원과 함께 처음 들으실 때 이걸 먼저 보셔도 좋겠어요. 곡이 짧은 편이라 한 번에 통째로 붙잡기 쉽습니다.
상대에게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자기에게 돌린 질문입니다. 사랑 노래인데 대상이 안쪽으로 옮겨 가요.
일곱 곡을 누가 채웠는지 보면 앨범이 보입니다
이번 앨범에서 정은지는 전곡 프로듀싱을 맡았습니다. 일곱 곡을 혼자 다 썼다는 뜻은 아니에요. 어떤 곡을 누구에게 맡기고 어디에 놓을지를 정했다는 쪽입니다. 그래서 참여 명단을 훑는 게 앨범을 읽는 가장 빠른 길이 됩니다.
트랙 순서는 파도 (i love LOVE), NO FIGHT, 링귀니, 바람따라, 다시 못 만날 것 같아, 낭만파티, 사랑이 지나간 자리입니다. 제목만 늘어놓아도 온도가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게 보여요. 앞쪽은 밝고 뒤로 갈수록 자리를 비우는 배치입니다.
링귀니는 10CM가 작사와 작곡, 편곡까지 맡았습니다. 요리 이름을 그대로 제목에 올린 곡이라 무게를 덜어 내는 자리에 놓였어요. 바람따라는 정은지와 적재가 같이 만들고 편곡은 적재가 했습니다. 타이틀곡에서 기타로 참여한 사람이 여기서는 곡 자체를 함께 쥔 셈이라, 두 곡을 이어 들으면 같은 손이 지나간 자국이 보입니다.
다시 못 만날 것 같아는 소수빈이 쓰고 만들었습니다. 제목부터 뒤쪽 트랙에 놓일 곡이에요. 앨범 후반에 이런 곡을 두고, 마지막을 사랑이 지나간 자리로 닫습니다. 여름 앨범이라고 해서 끝까지 밝게 가지 않습니다.
결국 이 앨범은 사랑이라는 한 단어를 일곱 번 다른 각도에서 놓아 본 기록에 가깝습니다. 장르를 하나로 묶지 않은 것도 그래서일 거예요. 각 곡을 다른 사람 손에 맡기면서도 앨범 하나로 읽히게 만드는 게 프로듀싱이 하는 일이고, 이번에는 그 역할을 본인이 가져갔습니다.
일곱 곡을 혼자 다 쓴 게 아니라 누구에게 어느 자리를 줄지 정했습니다. 프로듀싱은 그 일이에요.
무대가 이미 잡혀 있습니다
이 앨범은 음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9월 12일 저녁 여섯 시와 13일 오후 네 시, 서울 1975 씨어터에서 앨범과 같은 이름의 단독 콘서트 Summer, I가 열려요. 두 회차 모두 전석이 이미 나갔습니다.
그 앞에는 해외 무대도 있습니다. 9월 5일 대만 가오슝 아레나에서 열리는 HER VOICE 무대에 오릅니다. 앨범을 낸 뒤 곧바로 무대가 이어지는 일정이에요.
밴드 사운드로 만든 곡이라 이 일정이 곡의 완성에 걸립니다. 편곡을 겹겹이 쌓아 올린 곡은 라이브에서 원본을 따라가기 바쁘지만, 악기 몇 대가 자리를 나눠 갖는 곡은 그날의 연주에 따라 다른 물건이 됩니다. 파도가 어느 쪽인지는 9월에 드러날 겁니다.
숫자도 하나만 남겨 둘게요. 뮤직비디오는 11일 저녁 공식 채널에 올라와 하룻밤 사이 6만 회를 넘겼습니다. 다만 공개 직후의 관심을 가늠하는 참고치일 뿐이라 곡을 듣는 일과는 따로 두시는 편이 낫습니다.
6년을 비우고 돌아온 앨범인데 서두르는 소리가 안 납니다. 여름을 다 보내고 나서야 여름 앨범을 내놓은 것도 그 태도와 이어져 보여요. 계절이 한창일 때 올라타는 대신, 계절이 지나가는 걸 지켜본 뒤에 정리한 쪽에 가깝습니다.
계절이 한창일 때 올라타는 대신 지나가는 걸 지켜본 뒤에 정리한 앨범입니다.
이렇게 들으면 더 재미있다
- 타이틀곡을 들을 때 기타를 따로 떼어 들어 보세요. 목소리가 올라가는 구간에서 기타가 물러나고, 목소리가 낮아지면 다시 나옵니다. 두 소리가 자리를 주고받는 방식이 이 곡의 뼈대예요.
- 파도 다음에 바람따라를 바로 이어 보세요. 적재가 타이틀곡에서는 연주로, 이 곡에서는 작곡과 편곡으로 붙었습니다. 같은 사람이 다른 방식으로 들어온 두 곡을 붙여 들으면 차이가 선명합니다.
- 일곱 곡을 순서대로 한 번 통과해 보시길 권합니다. 앞쪽 밝은 곡들에서 사랑이 지나간 자리까지 온도가 한 방향으로 내려가요. 곡을 골라 듣기보다 배치를 따라가는 편이 앨범 제목의 쉼표를 이해하기 좋습니다.
- 링귀니만 따로 들어 보셔도 재미있습니다. 10CM가 쓰고 만들고 편곡까지 한 곡이라 앨범 안에서 목소리의 쓰임이 확 달라집니다.
6년을 비운 자리에 무엇을 채웠는지 보려면 타이틀곡 하나보다 일곱 곡의 순서를 보는 편이 낫습니다. 파도를 먼저 듣고, 그다음에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통과해 보세요. 쉼표를 왜 제목에 찍었는지가 마지막 곡에서 걸립니다.



